어느 신인 작가의 고백

CHAPTER 1

계약서 게임

이것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나 불공정 시나리오 계약서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CHAPTER 2

A 감독과 87인

신인 시나리오 작가 및 감독 87명을 대상으로 한국 영화산업의 시나리오 작가 계약서의 실태를 물었다.

CHAPTER 3

할리우드 사례

할리우드는 시나리오 작가 및 감독을 어떻게 대우하는가?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계약의 원칙을 공개한다.

2022 한국 신인 영화감독 · 시나리오 작가의불공정 계약 현황에 대한 보도

  • 기획·취재

    김성훈, 배동미, 남선우, 이유채

  • 웹사이트 개발·인터랙션 디자인

    YYY

  • 그래픽 디자인

    Workbüro(P)

  • 동영상

    민가경, 김효균, 김청솔, 윤소정

CHAPTER 1

계약서 게임

CHAPTER 1

계약서 게임

안녕하세요, 재능 있는 신인 작가의 데뷔를 적극 지원하는 영화제작사 씨네리 필름입니다. 작가님과 시나리오 계약을 체결하고자 합니다. 단, 계약서 조항 하나라도 동의하지 않을 시 계약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그럼, 계약서를 쓰시겠습니까?

1/6

CHAPTER 1

계약서 게임

작가님과의 계약기간이 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2/6

CHAPTER 1

계약서 게임

제작사는 시나리오 수정을 무제한으로 요구할 수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3/6

CHAPTER 1

계약서 게임

작가님은 계약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4/6

CHAPTER 1

계약서 게임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5/6

CHAPTER 1

계약서 게임

2021년 상반기 시나리오 표준계약서 사용 비율

6/6

CHAPTER 2

A 감독과 87인

시나리오

SCENARIO

  1. (영상)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쓴 각본. 장면이나 그 순서, 배우의 행동이나 대사 따위를 상세하게 표현한다.
  2. 어떤 사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상적인 결과나 그 구체적인 과정.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쓴 각본.” 표준국어대사전이 말하는 ‘시나리오’의 제 1 정의는 그 목적성에 기반을 둔다.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를 꿈꾸며 쓴다. 지문 한 줄이 화면을 채우고, 대사 한 줄이 배우로부터 뱉어지길 기대하며 쓴다. 시나리오는 감독이 상상한 작품으로 가는 지도이자 그 작품이 발 딛고 선 땅 자체다.

당연히 모든 시나리오가 영화가 될 순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과 돈.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러하듯, 영화 또한 관객에게 시청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종합예술로서 인력과 자본의 투입 없이 존재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화가 되지 못한 시나리오는 어디에나 있다. 제작사 사무실에, 감독의 컴퓨터에, 어쩌면 당신의 머릿속에도.

그러나 함께 영화로 만들자는 약속이 끝난 시나리오도 자주 갈 곳을 잃는다. 제작사와 작가가 각본·감독 계약을 맺었대도, 사정에 따라 얼마든 없던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는 계약 내용에 따라 몇 차례 탈바꿈하고. 투자 상황에 따라 이야기 규모가 달라지기도 한다. 원래 글쓴이가 그 본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도.

여기, 그럼에도 영화가 되지 못한 시나리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묻는다. 영화를 꿈꿨으나 영화를 만들지 못한 대가는 누가 치러야 하는가. 하나의 이야기에 여러 사람과 돈이 붙었다 떨어진 결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CHAPTER 2

A 감독과 87인

불공정 계약의 시작

2021년 12월 끝자락, 〈씨네21〉은 신인감독 A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그는 그동안 여러 단편영화를 연출했고, 장편 각본·감독 계약을 통해 상업 장편영화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신인이다. 메일 제목은 ‘Z제작사의 불공정 행위에 대해 취재를 요청드립니다. (신인감독 불공정계약 문제).’ 수 년 전 ‘젊은 영화인’으로서 〈씨네21〉과 인터뷰한 경험도 있는 A감독은 “좋지 않은 소식이라 죄송하지만 분명히 알려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며 운을 띄웠다.

MAIL

2021/12/27 (1시간 전)

Z제작사의 불공정 행위에 대해 취재를 요청드립니다. (신인감독 불공정계약 문제)

2020년 11월, A감독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 (가)에 관심을 보인 Z제작사와 각본·감독 계약을 체결했다. 그들이 작성한 두 페이지짜리 가계약서에는 계약금, 계약 기간, 수익지분, 각본료 및 연출료 등의 조건이 기입돼있었다. A감독은 회고했다.

“애초에 제가 작성했던 가계약서는 표준 계약서와 비교도 되지 않는 허술한 내용으로, 노예계약을 방불케 하는 독소 조항만 가득합니다. 지인들은 만류하였지만 이렇게 계약하게 된 이유는 Z제작사 대표가 XX대학교 수업에서 만난 선생님이어서입니다.”

A는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은 Z의 대표를 신뢰했다. 무엇보다 “신인 감독이자 작가로서 어떤 기회라도 잡아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Z가 계약 기간 내 작업량을 특정하지 않아 A는 몇 고가 될지도 모르는 시나리오 작성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또한 Z는 메인 투자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표준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겠다는 조건, A의 차기작 시나리오 두 편까지를 Z에 우선 공개해야 한다는 조건도 걸었다. 그리고 계약 시 알게 된 내용을 “언론 기타 매체에 제공하거나 쟁점화하거나 기타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을 위에 덧붙였다. A는 이것이 “고발 회피용 조항”이라 보았다.

CHAPTER 2

A 감독과 87인

영화가 되지 못한 글,
주인은 누구인가

더 큰 문제는 계약 체결 1년 후에 벌어졌다. 1년 간 Z와 A는 함께 A의 시나리오 (가)를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A는 Z의 요구에 따라 열 두 달간 18개의 시나리오 버전을 작업했다. 이 중에는 Z의 대표와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시나리오 (나), 이에 온전히 동의하기 어려웠던 A감독이 다시 작성한 시나리오 (다)도 있었다. 결국 2021년 11월, Z는 시나리오 수정에 대한 견해 차이로 계약을 해지할 것을 요구했고 A는 그것에 동의했다. 그런데 2021년 12월, Z제작사는 A감독에 계약해지 합의서를 발송하며 아래와 같은 요구를 했다.

계약해지 합의서
  1. 계약금과 진행비를 모두 돌려줄 것
  2. A는 초고 (가)에 대한 권리만을 가진다. (가) 이후 작성된 (나), (다)를 영화화할 시 Z의 동의를 얻고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3. 감독이 14일 이내에 답변이 없을 시 (가)에 대한 영화화 권리 일체는 Z에게 귀속된다.

A와 Z의 계약 해지는 “어느 일방의 귀책이나 과실로 인한 것이 아니며 작품의 기획 방향에 대한 쌍방의 이견을 존중하여 해지하는 것임을 확인한다”는 점은 Z제작사가 보낸 해지 합의서에도 명시되어있다. 그렇지만 Z는 계약해지에 대한 책임과 대가를 A에게만 지우려 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A감독은 변호인과 상담을 통해 Z제작사에 저작권 귀속 및 계약금 반환 의무가 없다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기존에 작성한 계약서에 따르면 A감독에게 저작권 양도나 계약금 반환, 위약금 의무가 없다는 점. 처음 제출한 초고 (가)부터 수정한 모든 시나리오의 저작권은 작가 본인이 단독으로 보유한다는 점. 계약해지 후 Z가 A와 작업한 시나리오를 영화화할 권리는 없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해를 넘긴 2022년까지 A감독과 Z제작사는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Z제작사는 A감독에게 “업계의 관례”를 따르라고 종용했으나 A감독은 응하지 않았다. A감독은 Z제작사와의 다툼 사실이 알려져 다른 영화사들이 자신을 기피하거나, 영화계 내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된다고 고백했다.

CHAPTER 2

A 감독과 87인

신인 감독·시나리오 작가 91.6%, “계약서 불공정하다”

이 고백은 A감독의 것만이 아니었다. A감독의 사례를 접한 〈씨네21〉은 지난 5월8일부터 6월2일까지 설문조사를 통해 신인 감독 및 시나리오 작가 87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집단은 한국영화감독조합(DGK),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SGK) 내 커뮤니티, 영상 관련 작가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모집했다. 이들은 25세부터 40대까지의 창작자들로, 이들 중 47.1%가 계약 작품 수, 공모전 입상 횟수를 포함해 5편 이상의 시나리오를 작업했다. OTT의 부흥에 힘입어 최근 영화인들이 드라마 시리즈 작업도 병행하는 바, 아래 시나리오 계약에 대한 답변은 OTT 시리즈에 대한 응답도 포함하고 있음을 밝힌다.

계약서가 불공정하다고 느낀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이들 중 91.6%가 “계약서가 불공정하다고 느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2014년부터 영화계에 도입되기 시작한 표준근로계약서(이하 표준계약서)가 신인 작가와 감독만큼은 비켜간 결과와 연결된다.

표준계약서로 시나리오 계약을 맺었습니까?

설문에 응답한 이들 중 단 4분의 1만이 표준계약서로 시나리오 계약을 맺었다고 답했다. 표준계약서로 계약을 맺지 못했다고 밝힌 이들 중 “영화사의 필요에 의해 형식상 표준계약서를 작성하였으나, 실제 계약은 영화사에서 자체적으로 제시한 계약서로 진행했다”는 답변, “처음엔 표준계약서로 계약하기로 약속했으나, 표준계약서의 주요 내용이 빠진 채 계약을 맺게 되어 중간에서 합의를 봤다”는 답변을 적은 이들도 있었다. 표준계약서를 허울 내지는 신인 창작자를 구슬리는 용도로 내세운 후 정작 진짜 계약을 맺을 때는 자체 조항을 가감한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계약은 했지만 계약서는 본 적이 없다”는 응답도 있었다.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작가가 제작자로부터 저작권을 제대로 보장받기란 어렵다. 응답자 중 31%만이 작품의 저자로서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다고 답했다. 60% 이상의 응답자는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이들 중에는 제작사로부터 “계약금을 돌려줄 경우에만 저작권을 보장하겠다”는 말을 듣거나, “크레딧은 얻었으나 저작권은 전적으로 제작사 소유”라는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던 이들도 있었다. 처음부터 계약서에 수익 지분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응답자도 7인이나 되었다. 작가에게 수익을 “0.001% 나눈다는 등 의미 없는 지분”만이 명시되었다는 사례도 존재했다. 5.7%의 기타 응답자는 대부분 각색 계약을 맺었던 신인들이었는데, “여러 명의 각색 작가가 공동 작업하면서 사실상 개인 저작권이 사라졌다”거나 “각색이라 저작권이 작가에게 없었다”고 답해 기타로 분류했다.

계약서에 독소조항이 포함된 경험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조항이었습니까?
  • 예, 59명

    67.8%

    복수응답 가능
  • 아니오, 24명

    27.6%

  • 기타, 4명

    4.6%

  • 아니오, 25명 27.6%

  • 기타, 4명 4.6%

저작권 문제 외에도 계약 파기 시 계약금 반납,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저임금, 작품의 원작자 혹은 각색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크레딧 제외, 불명확한 계약기간이 독소조항으로 지적받았다. 기타 응답 중에는 제작사의 요구가 있을시 무제한으로 수정에 응해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CHAPTER 2

A 감독과 87인

무시, 회피, 의리 …
그들이 말하는 ‘관행(慣行)’

A감독이 Z제작사로부터 들은 것처럼, 독소조항은 주로 영화계의 ‘관행’, ‘관례’라는 이름으로 계약서에 똬리를 틀었다. 관행과 관례의 탈을 쓴 요구를 실제로 받았다고 응답한 이가 절반을 넘었다.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것을 관행이란 이유로 요구받은 적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 예, 59명

    55.2%

    복수응답 가능
  • 아니오, 24명

    44.8%

  • 아니오, 24명 44.8%

“의리를 방패삼아 계약만료 후에도 재계약 없이 구두로 연장을 요구받았습니다.”

“영화 제작사나 투자배급사가 드라마, 웹툰 등 타 매체로 진출하면서 영화판에서 하던 대로 2차 저작권 전체를 가져갑니다. 그게 당연한 줄 압니다.”

“기성작가만 지원 가능한 기획개발프로그램에 경력자가 신인의 글을 빌려 선정되면, 해당 작품은 이름만 얹은 감독·작가·피디의 저작물이 됩니다. 이러한 경우가 소규모 제작사에서도 허다합니다. 신인작가가 이에 문제를 제기하면 제작사는 관행이라는 명목으로 괴롭힙니다.”

계약 횟수 이상으로 작가에게 수정을 요구하고 거절하면 잔금을 주지 않겠다고 하거나, 편집권을 보장해줄 수 없다는 ‘관행’도 신인들을 괴롭혔다. 드라마 제작사의 경우 편성이 될 때까지 무한정 작업할 것을 당연시한다는 이슈도 언급되었다.

독소조항과 관련하여 발생한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있습니까?

위와 같은 독소조항과 관련해 신인들이 문제를 해결한 비율은 21.4%에 그쳤다. 제작사와의 오랜 대화 끝에 갈등을 풀었다거나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운영하는 영화산업종사자 고충처리신고센터인 ‘영화인신문고’를 통해 사건 접수 후 절차를 밟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해결에 나서지 못했다는 신인들 중에는 “용기가 없었다”고 토로한 이도 있었는데, 업계 내에 안 좋은 소문이 나 기회를 얻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A감독과 같은 심경을 비쳤다.

“저는 운 좋게 문제를 해결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다는 점이 현 업계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작사와 크레딧 문제를 해결해봤다는 한 신인 감독의 진단은 현재 영화계 신인들이 처한 현실을 아프게 찌른다. 기회가 필요하지만, 계약은 공정하지 못하고, 그런 계약을 거쳐 탄생한 일련의 결과물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무언가가 된다. 영화가 되지 못한 글은 그렇게 유령처럼 극장가를 배회한다.

〈씨네21〉은 Z제작사에도 연락을 취해 반론을 들었다. 제작사 측은 우선 “배우로부터 관심 표명도 받은 상태였기에 빠른 기획과 제작 진행을 위해 양방 합의 후 약식 계약을 체결”한 것이지 “제작사의 요구에 감독이 어쩔 수 없이 따른 상황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짧은 분량의 계약서였지만 서로가 원하는 바를 명시해 계약했다는 것이다.

뒤이어 제작사는 각색에 대한 이견 확인 후 원만한 해지에 이르고자 “한국영화 제작 관례상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내용에 해당하는 해지 조건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제작사가 원한 방향은 “해지 합의에 이른 원인이 어느 일방의 귀책 사유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 “초고를 제외한 모든 수정고는 감독의 독자적인 창작물이 아닌 제작사의 아이디어・시간・비용 등이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점”, “그리하여 각색 시나리오 및 수정고에 대한 권리까지 모두 감독이 갖고자 한다면 계약금 반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법무법인을 통해 모든 작업 결과물에 대한 권리를 비롯해 계약금 및 진행비 반환이 불가하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제작사 측에서는 더 이상의 대화 창구가 차단당했다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해당 제작사는 “제작사의 방향을 감독에게 독단적으로 강요한 적도 없으며, 감독의 의견을 묵살한 적도 없다”라며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는 결론”과 함께 “감독이 본인의 작품을 영화화하여 관객과의 만남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CHAPTER 3

할리우드 사례

한국 신인작가가 겪는 불공정 사례를 취재한 〈씨네21〉은 다른 나라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눈을 돌렸다. 우리가 주목한 곳은 ‘꿈의 공장’이라 불리는 미국 할리우드였다. 세계 엔터테인먼트 산업 가운데 가장 ‘큰 바다’인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작가들은 어떻게 스튜디오와 계약을 맺을까. 그곳에서는 A 작가처럼 시나리오를 쓰고도 계약금을 돌려줘야 하는 억울한 작가가 없을까. 〈씨네21〉은 궁금증을 안고 할리우드 플레이어들을 직접 만났다.

미국 노동절인 9월4일, 〈씨네21〉은 ‘영화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에 발을 디뎠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기온이 높았고 햇볕은 따가웠다. 올여름 미국 서부는 심각한 폭염을 겪었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작가, 미국작가조합 임원, 프로듀서 등 8인은 한국 작가들을 위해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에 관해 들려주었다. 그리고 펜을 든 창작자들을 어떻게 보호하는지에 관해서도 알려주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작가의 상상력이 영화의 시작점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권익 보호는 단순한 선의가 아니라 산업 전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지금부터 할리우드 작가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CHAPTER 3

할리우드 사례

시나리오 작가를 보호하는 에이전트, 매니저, 그리고 변호사

할리우드 작가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 가지 키워드를 알아야 한다. 에이전트, 매니저, 그리고 변호사. 에이전트는 작가의 계약을 돕고 작가를 대리하는 인력을 말한다. 법률에 따라 시험을 보고 자격증을 획득한 이들만 미국에서 엔터테인먼트 에이전트로 일할 수 있다. “작가가 스튜디오와 직접 협상할 일은 없다. 작가가 보수에 관해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작가의 에이전트가 스튜디오와 이야기한다.” Apple TV+ 오리지널 〈파친코〉의 쇼러너인 수 휴 작가의 말이다. 그의 설명처럼 스튜디오와 계약을 맺을 때, 작가를 대신해 에이전트가 보수와 계약조건 등에 대한 협상을 벌인다. 계약이 성사되면 에이전트는 법률로 정한 10%의 수수료를 받는다. 수수료를 떼더라도 에이전트를 통해 계약금이 커지면, 작가도 에이전트도 이익이므로 아무리 일을 처음 시작한 작가일지라도 에이전트와 함께 계약을 맺는 것이 유리하다. 유명 에이전트의 경우 100여명의 영화인들을 담당하기도 하며, 작가를 주로 담당하는 에이전트는 ‘릿 에이전트(Literature Agent, Lit Agent)’라고 불린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매니저가 있었다. 신인작가들과 일하려는 매니저가 많은데, 신인 시절 나의 매니저는 에이전시와의 미팅을 주선했다. 에이전트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내가 에이전트를 고를 수 있도록 도왔다.”(수 휴 작가) 매니저는 에이전트보다 긴밀하게 작가와 일하는 인력을 일컫는다. 매니저는 대개 10명 이내의 작가를 담당한다. 에이전트에게는 자격증이 필요하지만, 매니저는 따로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신 매니저는 작가가 스튜디오와 계약할 때 법적인 절차에 참여할 수 없다. 한마디로 시나리오 계약은 에이전트가, 이외 전반적인 업무는 매니저가 하는 구조다.

“스튜디오가 작가를 고용하고 싶을 때 첫 제안서를 보내면서 작가의 변호사와 이야기해보자고 말한다. 변호사는 제안서를 검토한 뒤 중요 항목을 작가에게 알린다. 변호사는 작가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합의점을 찾아가면서 스튜디오와 여러 번 계약서를 주고받는다.”(에리카 리폴트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작가) 한국 시나리오 작가들이 제작사 대표와 단독으로 만나 계약서를 쓰는 것과 달리 할리우드 작가들은 변호사와 함께 계약서를 검토하고 계약을 맺는다.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의 김보연 작가는 “법률 용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라면서 “작가가 어떻게 법률적 지식을 가지고 스튜디오의 법률가들을 상대로 협상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다. 그는 작가에게 법률 대리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계약이 성사되면 변호사는 5%의 수수료를 지급받는다. 통상적인 변호사들은 수임료를 먼저 받고 일을 해나가는 것과 달리 미국 엔터테인먼트 변호사는 수임료 없이 일하고 계약이 성사될 때 수수료만 지급받기 때문에 신인작가일수록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시나리오 작가를 상상할 때 자기만의 방에 갇혀 글쓰기에 골몰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할리우드 작가들은 에이전트, 매니저, 변호사와 함께 일한다. 필요에 따라 작가들은 매니저 없이 에이전트, 변호사만 두기도 하고, 변호사만 둘 수도 있다. 그 형태가 무엇이 됐든 중요한 점은 작가가 아닌 그의 대리인이 스튜디오와 협상하고, 작가는 오롯이 글쓰기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CHAPTER 3

할리우드 사례

할리우드 작가가 계약하는 방법

할리우드 계약서
할리우드 계약서

할리우드 계약서

할리우드 작가가 서명하는 계약서에는 시나리오 초고, 수정고 등 작업의 성격과 보수, 마감일 등이 분명히 명시돼 있다. 이런 항목들에 대한 협상을 거친 계약서에 서명한 다음에야 할리우드 작가들은 펜을 든다. 할리우드 작가들은 평균 9~10주 동안 시나리오 초고를 집필하고, 9주 동안 수정고를 쓴 뒤, 6주간 시나리오를 다듬는 윤색 작업을 한다. 어떤 계약을 맺느냐에 따라 시나리오 초고와 수정고 작업만 할 수도 있고, 초고와 수정고 그리고 윤색까지 담당할 수도 있다. 스튜디오는 작가에게 계약에서 벗어난 작업을 요구할 수 없고, 관행처럼 수정고를 무제한 요구할 수도 없다.

모호한 계약서를 쓰고 총 18개의 시나리오 버전을 집필한 A 작가와 같은 사례는 할리우드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찰스 슬로컴 미국작가조합(Writers Guild of America, WGA) 부이사는 “작가가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판단해 스튜디오에 제출하면 스튜디오는 거부할 수 없다”라고 설명한다. “창의성의 기준은 모호하기 때문에 작가가 이미 쓴 각본을 스튜디오가 무를 수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스튜디오가 시나리오에 추가 수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해당 작가와 추가 계약을 맺어야 한다. 혹은 스튜디오의 판단에 따라 다른 작가와 계약을 맺어 각색을 맡길 수도 있다.

한국 시나리오 표준계약서
한국 시나리오 표준계약서
한국 시나리오 표준계약서
한국 시나리오 표준계약서

한국 시나리오 표준계약서

충무로에도 시나리오 집필의 성격과 보수, 마감일을 포함한 비교적 합리적인 계약서가 있다. 바로 시나리오 표준계약서다. 시나리오 표준계약서는 시나리오 집필 환경을 개선하고 시나리오 개발 과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2014년 5월 작가, 연출, 제작, 투자 등 한국영화계 각 분야의 조합들이 모여 만든 계약서다. 이를 만드는 데에만 2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문제는 제작사가 작가가 신인일 경우 시나리오 표준계약서가 아닌 그 무엇을 내밀기도 한다는 점이다. 또 2014년 이후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표준계약서가 한 차례도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다.

CHAPTER 3

할리우드 사례

작가의 창의력 보상에도 최저선은 있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최저임금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최저임금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최저임금

할리우드 드라마 작가 최저임금
할리우드 드라마 작가 최저임금

할리우드 드라마 작가 최저임금

설문조사에서 독소조항이 포함된 계약서를 경험한 적 있다고 밝힌 신인작가의 38.9%(23명)는 저임금을 문제로 지적했다. 이들은 계약서를 쓸 때부터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보수를 요구받았다. 최저임금을 보장받는 촬영과 조명 등 프로덕션 스탭과 달리 시나리오 작가의 일은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창의적인 영역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아닌 결과물에 초점을 맞추면 작가가 받아야 할 합당한 보수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들이 매년 오른 최소한의 보수를 보장받는 것이 그 예이다. 할리우드에서는 트리트먼트, 시나리오 초고, 수정고, 윤색 등 작업의 성격에 따라 시나리오 작가가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금액이 정해져 있다. 영화계뿐만 아니라 방송사에서 드라마, 시사프로그램, 리얼리티 프로그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작가들도 60분, 120분 등 프로그램 길이를 기준으로 최소한의 보수를 보장받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미국작가조합(Writers Guild of America, WGA)

미국작가조합(Writers Guild of America, WGA)

미국작가조합(Writers Guild of America, WGA)은 3년에 한번 스튜디오, 방송국과 만나 작가가 받아야 할 보수의 최저선을 협상한다. 가장 최근 협상은 2020년 초에 있었다. WGA는 2020년 5월부터 2023년 5월까지 3년간 작가가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금액을 문서화해 공표했다. 이 문서는 매해 적용받을 보수의 최저선과 일정을 명시했다고 하여 〈Schedule of Minimums〉라고 불린다. 신인작가라고 할지라도 WGA 소속이라면 〈Schedule of Minimums〉에 책정된 최저선보다 낮은 보수를 받지는 않는다. WGA 작가들과 일하고자 하는 스튜디오는 〈Schedule of Minimums〉를 반드시 지켜야 하며, WGA는 이 협상에 찬성한 스튜디오의 목록인 ‘WGA Signatory’를 홈페이지에 공개해 작가들에게 알리고 있다. 스튜디오를 압박할 만큼 강력한 WGA의 힘은 작가들이 함께 뭉치는 데서 출발한다. WGA는 작가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파업까지 벌이곤 한다. 1959년, 1988년, 2008년 할리우드에서는 WGA 주도의 대규모 작가 파업이 있었다.

CHAPTER 3

할리우드 사례

충무로 작가도 할리우드처럼 보호받을 수 있을까

물론 할리우드 작가 시스템을 충무로에 그대로 적용할 순 없다. WGA는 미국 법률이 인정하는 노동조합이지만,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은 노동조합으로서의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법률은 시나리오 작가를 노동자가 아닌 창작자이자 프리랜서로 본다. 김병인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대표는 “프리랜서들은 자유롭게 경쟁해야 하는데 작가들이 특정 가격 이하로 시나리오를 팔지 말자고 약속하면 담합이 된다”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펜을 놔버리는 순간 제작사나 투자사에 피해가 발생하고 손해배상 청구를 당할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2014년 시나리오 표준계약서를 만드는 역할을 한 전영문 영화진흥위원회 공정환경조성센터장은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차이를 “시나리오 작가를 노동자로 볼 것이냐, 개인 창작자이자 개인 사업자로 볼 것이냐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충무로에서는 작가를 창작자로 인정하고 작가에게 저작권을 폭넓게 부여한다. 작가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시나리오의 경우, 작가가 제작사와 ‘영화화 허락 계약서’를 썼더라도 제작사가 속편이나 리메이크를 제작하려면 작가의 허락이 필요하다. 반면 할리우드에서는 작가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시나리오라도 계약이 성사되고 나면 그에 대한 저작권이 스튜디오에 귀속된다. 하지만 〈씨네21〉의 설문에 참여한 87인의 신인 시나리오 작가 중 63.2%에 해당하는 55인은 저작권을 보장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독소조항을 묻는 질문에 대한 가장 많은 답변이 ‘저작권 회수’였다는 점 역시 작가들이 처한 녹록치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작가와 제작자의 마음은 동일할 것이다. 제작자 장원석 BA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영화 한편이 만들어지기까지 평균 3년이 걸린다”라면서 “제작사도 표준계약서에 따라 작가와 5년간 계약을 맺고 그 안에 영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라고 설명한다. 제작자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처우가 낮은 편에 속했지만 최근 영화와 시리즈 간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작가의 처우가 나아지고 있다”라는 고무적인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지금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전 세계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이를 이어가면서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려면 지금 새롭게 발돋움하는 신인작가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파친코〉 제작자 이동훈 엔터미디어 콘텐츠 대표)

한국의 신인 시나리오 작가들은 ‘영화라는 꿈’을 안고 제작사와 계약을 맺는다. 그 과정에서 작가들은 동료나 선배에게 자문을 구하지만 결국 법률 대리인 없이 홀로 계약을 맺고 모든 책임을 떠안는다. 제작사는 작가의 저작권을 폭넓게 보장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만난 신인 A 작가와 87인의 설문응답자들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충무로가 시나리오 작가를 창작자로 대우한다는 말이 이름 있는 작가들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이다.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창의성이 충무로로 흐르기 위해선 신인작가들을 마땅히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이야기는 신인작가의 글에서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